본문 바로가기

Trading Room

유럽은 자살하나?

유럽은 자살하나

시사INLive | 이종태 기자 | 입력 2012.05.14 10:28
위기가 증폭되어 돌아왔다. 그리스에 이어 경제대국 스페인이 침몰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 & P)는 지난 4월26일 스페인의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두 단계나 내렸다. 스페인 국채의 신용등급이 지난 7개월 동안 세 차례나 떨어진 것이다. 나흘 뒤(4월30일)에는 스페인 대표 은행인 산탄데르 등 16개 은행의 신용등급까지 강등시켰다. S & P는 스페인 GDP가 올해 1.5% 줄어들고 내년에도 0.5% 축소되리라고 내다봤다. 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4월 말 현재 실업률이 24.4%에 이른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50%가 넘는다.

유럽연합(EU)은 그동안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 등 'EU 변경 소국'의 경제위기를 관리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목표는 소국의 위기가 독일·프랑스·영국 등 EU 중심국으로 전염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EU에서 경제 규모 4위인 스페인이다. 스페인 인구(4500만명)와 GDP(2010년 현재 1조477억 달러)는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를 다 합친 수치의 두 배 정도다. 더욱이 스페인 위기는 경제 규모로 EU 3위 국가인 이탈리아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AP Photo 4월29일 마드리드 시민들이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직업, 연금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

스페인도 한때 '잘나가는' 나라였다. 1995년 이후 10여 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무려 4%. EU 국가로서는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 같은 시기 스페인에서는 주택이 700만 채나 늘어났는데, 공급 폭증에도 불구하고 주택 가격이 두 배나 올랐다. 물론 거품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부동산 경기를 타고 일자리(비록 상당수가 임시 계약직이었지만) 700만 개가 창출되었으며 가구당 명목소득도 세 배 가까이 올랐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 동안 누린 호경기는 스페인의 성장동력 산업들 덕분이다. 스페인은 1950년대 프랑코 군부독재 시절부터 제조업 경쟁력이 약했다. 당시 이 나라의 대표 산업은 관광업. 이에 더해 군부정권은 반공 및 집권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산자(proletarian)의 나라가 아니라 소유자(proprietors)의 국가'라는 슬로건으로 강력한 주택 소유 정책을 추진했다. 덕분에 스페인의 주택 소유율은 1970년대 60%, 1980년대 80%,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에는 거의 90%에 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건축업이 주력 산업으로 발전했다.

건축업은 1990년대 이후 스페인의 성장동력이었다. 이른바 지구화가 거침없이 진척되던 당시, 집권 사회당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게 된 외국 자본을 '부동산 개발'에 끌어들였다. 스페인 곳곳에 촘촘히 깔린 저축은행들과 산탄데르 같은 대형 금융기관이 외국 돈을 끌어들여 건축산업 부문의 '부동산 개발' 사업에 투자하는 식이었다. 이로써 부동산 시세는 계속 오르면서 건축업과 금융업 부문은 초과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해외 금융기관들은 매년 70억 유로를 스페인 부동산 시장에 투자했다. 이로써 관광·건축·금융이 스페인의 3대 주력 산업으로 떠올랐다. 그 대가로 스페인은 상당수 제조업종과 소매업, 국유 전력산업 등을 외국 자본에 넘기거나 포기했다.

이 와중에 일반 시민도 부동산 시세 상승으로 재미를 봤다. 2007년 현재 스페인 가구의 90%가 주택 소유자였는데, 이 중 700만 가구(30%)는 주택을 두 채 이상 보유한 중산층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이른바 '부(富)의 효과(Wealth Effect)'가 나타난다. 재산이 많아졌다고 느낀 시민들이 더 소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시민들이 소비하는 상품의 대부분은 물론 '제조업 빈국'인 스페인산이 아니라 독일 등 서유럽 제품이다. 이에 따라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적자는, 서유럽 부국들이 스페인 부동산에 투자한 돈으로 보전되었다. 이처럼 '부동산 개발 및 시세 상승'이라는 현상을 중심으로 스페인 국내에서, 그리고 스페인과 서유럽 사이에서 일종의 선순환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야말로 토건 중심 경제구조에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결합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런 선순환은 지구적 부동산 침체가 시작된 2007년 이후 악순환으로 돌변한다. 팔리지 않는 빈집이 100만 채에 이르고, 주택 보유자들의 채무는 GDP의 84%까지 치솟았다. 부동산에 투자한 금융기관들이 부실해지면서 자금 순환이 중단되고, 부동산 시세 폭락에 따라 '부의 효과'가 사라지면서 소비 규모도 격감했다. 기업들이 임시직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아 실업률이 폭증했고 이로써 세수가 격감해 재정위기가 심해졌다.

더욱이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2009년 중반, 스페인 정부는 GDP 대비 10%에 이른 재정적자를 2013년까지 3%로 줄이겠다며 강력한 긴축정책을 발표한다. 각종 정부 투자 취소, 공공부문 임금 삭감, 실업급여·연금·의료보험 서비스 축소 등의 내용이다. 이에 따라 2010년 이후 스페인 전역에서 대규모 민중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그들의 슬로건은 이렇다. "우리에겐 직업도 연금도 없다. 그래서 두려움도 없다."

'1000유로도 못 받는 세대'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올해 정부지출을 420억 유로(약 62조원) 깎았다. GDP의 4%에 달하는 금액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파탄한 민생을 절벽으로 밀어붙이는 계획이다. 청년층이 가장 큰 피해자다. 한국의 '88만원 세대'처럼 스페인에는 '1000유로 세대(Mileuristas)'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한 달에 1000유로(약 148만원) 받고 일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최근에는 '1000유로도 못 받는 세대(Nimileuristas)'라는 명칭이 새로 유행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희망의 부재'이다. 스페인의 긴축은 EU 차원에서 강제된 정책이다. 독일·프랑스·영국 등 EU 중심국들은 '위기 국가'에 충분한 구제금융을 제공할 생각은 없지만 손 놓고 방관할 수도 없다. 중심국들의 금융기관이 엄청난 자금을 '위기 국가'에 투자해둔 상태이기 때문이다. '위기 국가'들이 '빚 못 갚겠다'고 디폴트를 선언하면 중심국 금융기관들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Reuter=Newsis 4월27일 마드리드의 실직자들이 정부가 운영하는 고용촉진사무소 앞에 줄을 서서 상담을 기다리고 있다. 스페인의 실업률은 24%가 넘는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긴축을 강요한다. 재정지출을 줄여 빚을 갚으라는 의미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해 말부터 1조 유로의 재원을 마련해 연이율 1%의 초저금리로 EU 내의 '취약 은행'에 대출하는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LTRO)'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겨우 4개월여 만에 스페인 사태로 유럽 금융 시스템이 새롭고 더욱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빠져든 것이다.

이는 재정긴축 정책이 실물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LTRO)' 역시 위기를 더욱 증폭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은행들은 이 자금을 실물경제가 아니라 EU 각국의 국채에 투자했다. 1%로 빌려 금리 4~6%인 국채에 투자했으니 은행으로서는 무조건 남는 장사다. 그러나 EU의 실물경제가 계속 악화되면서 국채 또한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산불처럼 번졌다. 이런 국채를 다수 보유한 금융기관 역시 '신뢰의 위기'에 빠져 재무상 건전성이 나빠지고 이에 따라 대출 여력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불거지고 있다.

이는 EU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어 최근에는 네덜란드, 루마니아 등의 내각 총사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EU 위기관리 시스템 사실상 파산

지금 국제 금융시장은 스페인의 구제금융 요청 가능성에 전율하고 있다. 지난해 유로존의 구제금융기관으로 출범한 유로안정화기구(ESM)는 8000억 유로(약 1190조원) 정도의 자금을 보유했다. 이 중 일부는 이미 그리스·포르투갈에 지원했다. 그런데 스페인의 공공 부채는 7000억 유로에 달한다. 더욱이 스페인이 흔들리면 이탈리아도 무사할 수 없다. 이탈리아의 채무 규모는 무려 1조9000억 유로다.

이는 '긴축'과 '소규모 구제금융'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 EU의 위기관리 시스템이 더 이상 가동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1~3월에 일자리 37만4000개가 없어졌는데, 이런 추세면 올해 세수 역시 1조 유로 정도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재정긴축에도 불구하고 국가부채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 확실하다.

또한 스페인이 이런 가혹한 개혁을 견디지 못하고 구제금융을 요청하거나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다. 이 경우, EU 위기관리 시스템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는 초토화될 것이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위기가 본격화되어 EU 전역과 지구경제를 강타할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는 < 뉴욕 타임스 > (4월15일자)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스페인은 재정을 물처럼 쓰는 국가가 아니었다. 세계 금융위기 직전까지 스페인은 재정흑자를 기록했고 부채도 많지 않았다. 스페인의 재정위기는 불황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유럽 정치가들은 대륙 차원에서 경제적 자살을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